센다이 공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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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센다이 공습은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5년 7월 10일, 미국 육군 항공군에 의해 일본 센다이 시에 가해진 무차별 폭격이다. 1944년 미군이 마리아나 제도를 장악하면서 일본 본토가 B-29 폭격기 사정권에 들어가자, 미군은 센다이를 소이탄 공격에 적합한 도시로 평가하고 공습을 감행했다.
123기의 B-29 폭격기가 투하한 11만 4천 개 이상의 소이탄으로 센다이 시 중심부는 초토화되었으며, 5만 7천 명 이상의 피재자와 987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공습 후 센다이 시는 전재 복구 위원회를 설치하여 도시 복구 사업을 추진했으며, 1977년까지 사업을 완료하여 도시의 면모를 일신했다. 센다이 시에는 희생자를 추모하는 시설이 건립되었으며, 1944년 12월 시오가마시 공습을 시작으로 미야기현은 여러 차례 공습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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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NHK에서 방영된 대하드라마 《독안룡 마사무네》는 다테 마사무네의 생애를 그린 작품으로, 높은 시청률과 함께 역사 왜곡 논란 및 폭력성 비판이 있었으며, 한국 드라마 복수극 장르에 영향을 주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 센다이시의 역사 - 다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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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다이 공습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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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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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전투명 | 센다이 공습 |
전역 | 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쟁, 일본 본토 공습) |
시기 | 1945년 (쇼와 20년) 7월 10일 |
장소 | 미야기현센다이시 |
결과 | 미국군의 목표 달성. 센다이시가 괴멸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일본군 |
교전국 2 | 미국군 |
지휘관 | |
일본군 지휘관 | (정보 없음) |
미국군 지휘관 | (정보 없음) |
병력 규모 | |
일본군 병력 | 고사포 15문 |
미국군 병력 | 보잉B-29 123기 |
피해 규모 | |
일본군 피해 | 피재 인구 57,321명 피재 가옥 11,933호 사망자 1,064명 이상 |
미국군 피해 | 손해 없음 |
2. 공습의 경과
1945년 7월 10일, 미국 육군 항공군제20항공군 소속 제58폭격비행단은 일본 센다이시에 대한 대규모 공습을 감행했다. B-29 폭격기 131기가 테니안 서 비행장을 출격했으며, 고장으로 돌아간 기체를 제외한 123기가 센다이 상공에 도달했다.[3]
센다이시에서는 공습 당일 21시 30분에 공습 경보가 발령되었으나 22시 22분에 해제되었고, 22시 56분에 다시 경보가 발령되었다가 곧 해제되었다.[4] 실제 공습은 7월 10일 0시 3분경에 시작되었으며, 0시 5분에 다시 공습 경보가 발령되었다.
B-29 폭격기들은 고도 약 3000m에서 2~5기씩 편대를 이루어 약 2시간 동안 센다이 시내를 폭격하여, 센다이 시 중심부는 초토화되었다. 미국군은 사전에 촬영한 항공 사진을 바탕으로 신덴마초와 히가시산반초 교차점을 소이탄 투하 목표 지점으로 설정했다. 일본 측 기록에서도 신덴마초, 히가시니반초, 오마치가 처음으로 집중 공격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2. 1. 공습의 배경
1945년 1월, 괌 제21폭격집단 사령관으로 커티스 르메이 소장이 취임하면서, 일본 본토 공습은 군수 공장뿐만 아니라 민간인 거주 지역까지 포함하는 무차별 폭격으로 확대되었다. 이는 일본의 항복을 압박하기 위한 전략이었다.[3]1945년 5월, 미군은 센다이시를 정찰 비행하여 도시 모습을 촬영하였다. 미군은 센다이가 공업적인 중요성은 크지 않지만, 주택 밀집 지역이 많고 화재를 막을 넓은 도로와 광장이 거의 없어 소이탄 공격에 적합하며, 폭격에 의한 심리적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또한, 미군은 대규모 공습에 앞서 "센다이 좋은 도시 숲의 도시 7월 10일은 잿더미 도시"라고 적힌 삐라를 살포하여 공습을 예고했다.[3]

2. 2. 공습의 피해
1945년 7월, 센다이 시청 방위과에서 정리한 조사 보고에 따르면, 센다이 공습으로 피해를 입은 가구는 1만 1933호, 피해 인구는 5만 7321명이었다. 이 공습으로 987명이 사망하고, 260명이 중상, 1423명이 경상을 입었으며, 50명이 행방불명되었다.[3]전후 센다이 시민들이 펴낸 책에 따르면, 센다이 공습으로 인한 희생자는 1064명, 신원 불명 및 행방불명자는 335명으로 추정된다. 다만, 이 희생자 수에는 7월 10일 이후의 총폭격으로 인한 희생자도 포함되어 있다.[4] 희생자가 많아 일부는 히로세강 하천 부지에서 화장되었다.[5]
센다이역에서 니시 공원이, 사카나마치에서 센다이역이 보였다는 체험담이 전해질 정도로 시가지가 잿더미가 되었다.[5] 센다이성도 폭격을 받아 오테몬과 와키야구라가 소실되었고, 니노마루에 있던 제2사단도 피해를 입었다. 다테 마사무네의 영묘인 즈이호덴도 소실되었다. 오테몬과 와키야구라, 즈이호덴은 국보였으며, 이로써 센다이시의 국보는 오사키 하치만구만 남게 되었다. 한편, 쿠니타케에 있던 도쿄 제1 육군 조병창 센다이 제조소(현재의 육상자위대・센다이 주둔지)는 공습을 받지 않았다.
미국군의 손실은 테니안 서 비행장에서 이륙에 실패하여 불탄 1기(승무원 전원 탈출)뿐이었다. 그러나 도호쿠 군관구 사령부는 "격추 5, 격파 12"라는 허위 전과를 발표했다.[6]
3. 투하된 소이탄
미국군 자료에 따르면 센다이 공습에서 투하된 소이탄 및 집속 소이탄은 1만 2961발, 911.3ton이었다.[7] 일부 문헌에서는 917.6ton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고성능 폭탄 8발을 포함한다고 하지만, 이는 조명탄(photoflash)의 오역일 가능성이 있다.[7]
투하된 소이탄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 M-47: 약 45.36kg 교착 가솔린 폭탄(대형 유지 소이탄)
- M-69: 약 226.80kg 집속 소이탄 (M-69 소형 유지 소이탄 2.7kg 48개 들이)
- M-17: 약 226.80kg 전자 집속 소이탄 (마그네슘, 테르밋 소형 소이탄 1.8kg 48개 들이)
이 중 2,155개가 집속 소이탄 (M-69, M-17)이었다.[2] 따라서 소형 소이탄의 개수는 2,155 × 48 = 103,440개, 대형 소이탄의 개수는 12,960 - 2,155 = 10,805개이며, 총 114,245개의 소이탄이 투하된 셈이다.
4. 전재 복구 사업
센다이시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전재 복구 사업을 통해 도시 재건을 추진했다. 미야기현과 센다이시는 협력하여 복구 계획을 수립하고, 토지 구획 정리 사업을 진행했다. 그 결과 아오바 거리, 히로세 거리 등 주요 도로와 니시 공원, 고토다이 공원 등 공원이 정비되었다.
4. 1. 복구 과정
센다이 시전(市電)은 시 중심부의 많은 노선에서 피해를 입었지만, 차고에 있던 차량은 피해를 입지 않아 다음날 11일부터 왕복 운전을 시작하며, 전재 복구에 기여했다. 종전 후 8월 20일에 전 노선이 복구되었다. 한편 피재 지역의 복구는 늦어져, 1945년(쇼와 20년) 11월 3일에는 피재자들이 센다이 시에서 '전재자 대회'를 열어, 구 일본군 불하 물자의 피재자 우선 배포와 토지 국가 관리로 인한 주택 건설 등을 요구했다.[8]복구 사업은 미야기현이 7월부터 전시 주택과 넓은 간선도로 건설 계획을 세웠지만, 종전을 맞아 실현되지 못했다. 종전 후 미야기현 토목 계획과가 내무성 지도하에 복구 계획을 다시 수립했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정부가 '전재 복구 도시 계획의 기본 방침'을 각의 결정하여 시정촌장이 사업 권한을 갖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내용을 포함함에 따라, 1946년(쇼와 21년) 2월 센다이 시 의회는 만장일치로 센다이 시가 사업 주체가 되는 것을 결정하고, 현과 국가와 협력하여 복구 사업을 진행했다.
1946년(쇼와 21년) 4월, 시의원 전원 44명과 학식 경험자 20명으로 구성된 총 64명의 '센다이 시 전재 복구 위원회'가 설치되었고, 그중 23명은 '복구 상임 위원'으로 상시 참여했다. 같은 해 5월에는 복구 사업 실시 기관인 복구국이 신설되었다. 같은 해 6월, 공선(公選)으로 선출된 첫 시장 오카자키 에이마츠가 복구 계획을 주도했으며, 복구 위원회 검토와 함께 도시 계획 가로, 공원 녹지 등이 같은 해 8월에 정리되었다. 이 최종안은 같은 해 11월 전재 복구원의 허가를 받아 결정되어, 아오바 거리나 히로세 거리 등의 큰 길 건설과 니시 공원, 고토다이 공원 등의 공원 정비를 포함한 구체적인 복구 사업이 시작되었다.[9]
주택 부족으로 인해 방공호로 피난하여 목숨을 건졌지만 거주지를 잃은 피재자 중에는 1947년경까지 방공호에 계속 거주한 경우도 있었다.[5]
당초 복구 계획은 전재를 입은 센다이 시 중심부, 가와우치 지구, 요네가사쿠라 지구를 합쳐 423.5헥타르를 토지 구획 정리로 진행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가와우치 지구가 미군에 접수되고, 센다이 역 동쪽을 신데라코지도시 개조 사업으로 옮기는 등의 변경으로 인해, 291.1 헥타르에 대해서만 사업이 시행되었다.
토지 구획 정리 사업으로 진행되었으며, 구역 내 지권자에게 25%의 토지를 제공받아(25% 감보) 도로, 공원 녹지를 정비했다. 1961년(쇼와 36년) 3월에 15년에 걸쳐 공사가 거의 완료되었다. 1977년(쇼와 52년) 10월에는 30년에 걸쳐 환지 등 정산 사무의 정산금 징수, 지불 일부를 제외하고 모두 완료되었다. 이로써 전국 복구 사업 실시 102개 시 중 굴지의 성과를 올려 전재 사업이 완료되고 도시 면모가 일신되었다.
총 사업비 | 12.7억엔 (국가·현 보조 3.9억엔, 시채 8.8억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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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행 면적 | 291.1ha |
도시 계획 도로 19노선 | 18,500m (면적 2.5배 증가) 정리 전 336000m2 정리 후 825000m2 |
도시 계획 공원 14곳 | (면적 9배 증가) 정리 전 22800m2 정리 후 181800m2 |
공공 용지 | 1006800m2 (면적 3배 증가) 정리 전 22800m2 정리 후 181800m2 |
건물의 이전 | 3,170건 (그 중 튼튼한 건물 11건) |
; 무전주화
: 도시부의 히가시이치반초 거리, 히가시니반초 거리, 아오바 거리, 히로세 거리, 조젠지 거리 니시마치선, 나가마치 즈츠미마치 선 6개 노선을 지하 배선화하여 무전주화했다. 건설 대신 표창을 받았다.
; 사찰 이전
: 구역 내 사찰을 기타야마 령원으로 이전하여 거리에서 묘비를 없앴다. 만간지, 코엔지, 다이쇼지, 미야기현 신직회 묘지가 이전되었다.
; 학교 이전
: 도키와기 학원, 이쿠에이 학원, 센다이 고등학교, 센다이 상업 학교를 구역 밖으로 이전했다.
; 동물원 이전
: 센다이 시 동물원을 효테이카와라에서 미쿠사와로 이전했다. 어린이 동물원으로서 1957년 (쇼와 32년) 10월 개원했다.[10]
4. 2. 복구 사업의 성과
센다이시는 1977년까지 30여 년에 걸쳐 복구 사업을 완료했다. 총 사업비는 12.7억엔이 투입되었으며, 도시 계획 도로와 공원이 대폭 확충되었다. 상세한 내용은 아래 표와 같다.[9]항목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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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사업비 | 12.7억엔 (국가·현 보조 3.9억엔, 시채 8.8억엔) |
시행 면적 | 291.1ha |
도시 계획 도로 | 19개 노선, 총 18,500m (면적 2.5배 증가: 정리 전 336000m2 → 정리 후 825000m2) |
도시 계획 공원 | 14곳 (면적 9배 증가: 정리 전 22800m2 → 정리 후 181800m2) |
공공 용지 | 면적 3배 증가 (정리 전 22800m2 → 정리 후 181800m2) |
건물 이전 | 3,170건 (그 중 튼튼한 건물 11건) |
이러한 성과로 센다이시는 전국 102개 복구 사업 시행 도시 중에서도 뛰어난 성과를 거두어 도시의 면모를 일신하였다.
또한, 주요 도로의 전선을 지하로 매설하여 전신주를 없애고, 만간지, 코엔지, 다이쇼지 등 사찰들을 기타야마 령원으로 이전하여 거리에서 묘비를 없앴다. 도키와기 학원 고등학교, 센다이 이쿠에이 학원 고등학교, 센다이 시립 센다이 고등학교, 센다이 시립 센다이 상업 고등학교 등의 학교와 센다이 시 동물원도 이전되었다.[10]
5. 추도시설
센다이 공습 희생자를 추모하는 시설은 다음과 같다.
; 센다이시 「전재 사망 정령 공양비」
센다이시가 건립한 센다이 공습 희생자 공양비이다.[11]
; 브론즈상 「나츠코・11살의 여름」
센다이 공습 희생자 중 한 명인 나츠코(당시 11세)를 모티브로 한 브론즈상으로, 전후 50년을 기념하여 시민 유지가 기증했다.[11] 센다이시 전쟁 재해 부흥 기념관에는 공습의 양상이 전시되어 있다.[2]
6. 기타 미야기현의 공습
1944년 (쇼와 19년)
- 12월 29일 5시 42분, 시오가마시에 B-29 한 대가 소이탄 약 300개를 투하했다. 이 기체는 이와테현의 정찰을 마치고 시오가마를 폭격한 것으로 추정된다. 소실된 가옥 440호, 피해자 2,142명, 사상자 3명. 이것이 미야기현 최초의 공습이었다.[2]
1945년 (쇼와 20년)
- 3월 10일, 도쿄 대공습 당일 도쿄 이외의 일본 각지에 소수 기체에 의한 분산 공습이 행해졌다. 이것은 일본 측의 방위 체제 분단을 노린 것으로 보인다. 미야기현에서는 B-29 세 대가 자오 연봉의 후보야마에 추락해 34구의 시신이 수습되었다. 또한 B-29 두 대가 카스미노메 비행장 부근에 소이탄을 투하하여 2호가 전소되었다.[2]
- 5월 25일, B-29에 의한 센다이 공습을 위한 정찰 비행이 이루어져, 상공 8000피트에서 센다이 시내의 항공 사진이 촬영되었다.[2]
- 6월 이후, 이와누마시의 야노메 비행장(제104비행부대)에 대한 공습[2]
- 7월 5일, B-29 두 대가 아시노쿠치에 폭탄 3개를 투하했다.[2]
- 7월 10일, 센다이 대공습.[2]
- 7월 11일, 이와누마시 타마우라·센가 지구에 대한 공습으로 가옥 11호가 전소되었다.[2]
- 7월 12일, B-29 한 대가 센다이 근교에 소이탄 36개를 투하했다.[2]
- 7월 13일, 함재기가 날아왔다. 17일, 함재기가 센다이 비행장을 총 폭격했다.[2]
- 7월 25일, B-29 한 대가 센다이 상공을 북상했다.[2]
- 8월 9일~10일, 일본 각지가 함재기 수백 대로 총 폭격을 받았다. 미야기현의 총 폭격 지점은 다음과 같다.[2]
- * 도쿄 제1 육군 조병창 센다이 제조소, 카스미노메 비행장.
- * 이시노마키, 전투기가 선박, 전화국, 비행장을 공격, 나카세의 무라카미 해군 조선소[12]에서 희생자 6명.
- * 오나가와, 해군 방비대 기지가 있던 오나가와항에서 마을 중심부에 걸쳐 그루먼 전투기 편대에 의한 기총 소사. 군함·운반선 20척 격침, 승무원 등 200명 사망. 오나가와역 앞의 가옥도 피해를 입었다. 그 외에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던 에노시마도 공격을 받아 사망자 19명, 부상자 16명.
- * 야모토 (현재의 히가시마쓰시마시), 마츠시마 해군 항공대의 야모토 비행장의 군용기 대부분이 폭격으로 파괴됨.
- * 타가조 해군 공창
- * 이와누마, 이와누마역에 공습.
- * 후나오카
- * 와타리, 와타리역 발 센다이행 열차가 스이다 부근에서 그루먼 전투기의 기총 소사로 다수의 부상자와 6명의 사망자 발생.
- * 코고타, 그루먼 10여 대가 날아와 코고타역의 철도 시설과 노다 다리에 대한 공격으로 사상자 발생.
- * 게센누마, 그루먼 편대가 날아와 각지에서 폭격과 기총 소사, 시시오리 지구에서 사망자 18명.
- * 후루카와시(현재의 오사키시), 수 대의 전투기가 폭탄 투하, 사망자 7명, 부상자 8명.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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ビジュアルブック 語り伝える空襲 10万人が殺された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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七月十日は灰の町 : 仙台空襲と戦争中のこ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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仙台空襲77年 ウクライナの戦禍「あの頃と同じ」 壕生活体験した庄司さ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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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北軍管區司令部發表(七月十一日午前十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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犠牲者や爆弾 異なる表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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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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戦災者大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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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年の市長公選運動(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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福島大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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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木山 (宮城県) 재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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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成22年度:仙台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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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ノ森萬画館, 石巻ハリストス正教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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仙台空襲から75年…「二度とあってはならない」語り継ぐ悲しみの歴史【宮城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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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相馬 宏男】仙台空襲から75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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仙台空襲、狙われた交差点 街角に爆心地の記録残したい:朝日新聞デジタル
https://www.asahi.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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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仙台市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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